확대 l 축소

[칼럼] ‘재판지연방지법’ 없이 재판소원은 약자에게 또 다른 고통이다

헌법재판소가 최근 국회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법원의 재판’을 헌법소원의 대상으로 포함하는 이른바 ‘재판소원’ 제도 도입에 대해 “국민의 기본권 보호를 위한 취지에 공감한다”고 밝히며, 한국 사법체계는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더불어민주당 정진욱 의원이 대표발의한 헌법재판소법 개정안은, 현재 헌법재판소법 제68조 제1항에 명시된 ‘법원의 재판은 헌법소원 대상에서 제외’라는 조항을 삭제하고, 사법절차를 통해서도 기본권 침해가 발생할 수 있음을 법적으로 인정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재판소원 제도는 독일, 스페인, 체코, 헝가리, 대만 등 다수 대륙법계 국가들이 이미 시행하고 있으며, 형식적 판결의 적법성보다는 국민 개개인의 기본권 실질 보장을 중심에 둔 사법 패러다임 전환이라 할 수 있다. 그 의미에서 헌재의 입장은 헌법상 인권보장 원칙에 부합하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심각한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재판소원’은 고의적 재판 지연 전략과 결합될 경우, 오히려 약자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는 도구가 될 수 있다.

현실의 법정에서 돈과 시간은 곧 전략이다. 자산이 풍부한 당사자는 고액의 수임료로 변호사를 선임하고, 이의신청과 항소·상고를 반복해 사건을 장기화한다. 그러는 동안 상대방은 심리적·경제적으로 지치고, 때로는 재판에서 이겨도 삶에서 지게 된다. 만약 이들 강자가 재판소원까지 청구하여 확정판결의 집행을 지연시키는 수단으로 활용한다면, 헌법재판소는 기본권 보장의 수호자가 아니라 시간을 끌기 위한 제4심 법정으로 전락할 수 있다.

가령, 노동자가 억울한 해고에 대해 긴 싸움 끝에 대법원에서 승소했지만, 사용자가 곧바로 재판소원을 청구하면서 그 효력을 중단시킨다면? 양육권, 임금, 재산분할, 퇴직금 등 민생 현안이 걸린 사건에서, 경제적 약자는 법과 제도보다 지연과 지출에 짓눌리게 된다. 이는 결코 헌법이 바라는 정의로운 절차가 아니다.

따라서 재판소원을 헌법상 기본권 구제 장치로 도입하되, 반드시 함께 제정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재판지연방지법’이다.

이 법은 단순한 절차 규율이 아니라, 정의의 속도를 회복시키는 사법개혁의 핵심 축이다. 1심은 6개월, 항소심은 4개월, 대법원은 6개월 등 각 심급별 처리기한을 설정하고, 인신구속이나 장애인·노인·저소득층 사건에 대해서는 우선심리 사건으로 지정해 신속하게 처리해야 한다. 재판이 과도하게 지연될 경우 담당 재판부는 사유를 공식 보고하고, 필요시 사법행정기관의 감사를 받도록 해야 한다. 나아가 재판 지연으로 인해 상대방에게 발생한 물적·정신적 피해에 대해 일정한 손해배상 청구권까지 부여하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또한 재판소원 그 자체도 남용을 막기 위해, 헌법상 중대한 기본권 침해가 명백한 경우에만 접수받도록 청구 요건을 엄격히 해야 하며, 효력정지 가처분은 예외적 상황에서만 허용해야 한다. 그래야만 이 제도가 국민의 권리를 연장하는 통로가 되지, 강자의 시간을 연장하는 무기가 되지 않을 것이다.

헌법은 국민 모두의 것이다. 그러나 사법절차는 종종 자원의 격차를 투영하며, 그 헌법적 이상을 무력화한다. 재판소원은 국민에게 마지막 희망의 문을 열어주는 제도지만, 그 문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늦고 고통스럽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지금 헌법적 권리 보장과 사법적 속도 회복이라는 두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

정의는 단지 옳은 결과를 의미하지 않는다. 정의는 또한 적절한 시간에 도달한 옳은 결과여야 한다. 재판소원은 문을 열되, 지연의 벽도 반드시 무너뜨려야 한다. 그리고 그 첫 단추는 바로 ‘재판지연방지법’이다.

이전화면맨위로

확대 l 축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