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가톨릭 교회의 미국 내 최고위 성직자 중 한 명으로 군림했던 시어도어 E. 매캐릭(Theodore E. McCarrick) 전 추기경이 94세로 사망했다. 그는 미성년자와 신학생을 상대로 한 성적 학대 혐의로 인해 2019년 가톨릭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추기경직과 사제직을 동시에 박탈당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로버트 W. 맥엘로이 워싱턴 대주교는 성명을 통해 매캐릭의 사망을 공식 확인했으나, 사망의 정확한 원인과 구체적인 장소 등은 공개하지 않았다. 바티칸은 그가 미국 미주리주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최근까지 그곳에서 조용히 거주해온 것으로 파악된다고 밝혔다.
가톨릭 교회의 상징에서, 치욕의 중심으로
시어도어 매캐릭은 1930년생으로, 미국 가톨릭 교회 내에서 오랜 세월 동안 영향력을 행사해온 고위 성직자였다. 그는 뉴욕, 메트루첸, 뉴어크, 그리고 워싱턴 D.C. 등 주요 대교구에서 사목활동을 했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신임을 받아 2001년에는 워싱턴 대교구의 대주교이자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성직자들의 성적 학대 문제에 대해 "교회 차원의 엄격한 대응"을 주장했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2018년, 그 자신이 수십 년간 미성년자와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지속적인 성적 학대를 자행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전 세계 가톨릭 교회에 충격을 안겼다.
2018년, 침묵이 깨어진 순간
매캐릭에 대한 최초의 공식 혐의는 2018년 여름, 뉴욕 대교구의 내부 조사에서 비롯되었다. 조사는 그가 1971~1972년 사이 뉴욕의 몬시뇰로 재직 중이던 시절, 10대 제대 봉사자를 성추행했다는 증언에서 출발했다. 교구의 독립 위원회는 혐의를 "신빙성 있음(credo)"으로 판단했고, 뉴욕 대교구는 이를 바티칸에 보고했다.
이후 그의 과거를 둘러싼 의혹이 연이어 쏟아졌다. 뉴저지주 메트루첸 교구와 뉴어크 대교구에서는 각각 1980년대와 1990년대 그가 신학생들과의 부적절한 관계로 고발당했으며, 두 건 모두 금전적 합의로 종결된 사실이 드러났다. 피해자들은 매캐릭이 자신을 ‘삼촌 테드(Uncle Ted)’라 부르게 하며 친밀한 관계를 가장한 채 성적 학대를 자행했다고 진술했다.
바티칸의 역사적 결단: 추기경직 박탈과 사제직 추방
2018년 7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매캐릭의 추기경직 사임을 전격 수락했다. 이는 1927년 이후 처음으로 추기경이 교황청의 정치적 이유가 아닌 성적 학대 문제로 물러난 사례였다. 더 나아가 교황은 그에게 "은둔적 기도와 회개의 삶"을 명령하며, 공식 직무에서 완전히 배제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2019년 2월이었다. 바티칸 신앙교리성(Congregation for the Doctrine of the Faith)은 교회법 재판을 통해 매캐릭이 수십 년간 미성년자 및 신학생에 대해 성적 학대를 저질렀다는 혐의에 대해 유죄를 확정했다. 이에 따라 매캐릭은 사제직에서 완전히 파면되었고, 평신도로 강등되었다. 이는 가톨릭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추기경이자 대주교가 성적 학대 혐의로 인해 사제직까지 박탈당한 전례 없는 사건이었다.
법정에서도 서는 전 추기경
비록 대부분의 성적 학대 혐의는 공소시효 만료로 형사 기소가 어려웠으나, 2021년 매사추세츠주에서는 이례적으로 그에 대한 형사기소가 성립되었다. 웰즐리(Wellesley) 대학 구내에서 열린 한 결혼식장에서, 매캐릭이 16세 소년을 성추행한 사건이었다. 해당 사건은 매캐릭이 주 외에 장기간 거주하면서 공소시효가 정지되었다는 주법 조항 덕분에 기소가 가능했다.
그 사건은 2021년 9월 정식 재판 절차에 돌입했으나, 그의 고령과 건강 상태로 인해 실질적 처벌에 이르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매캐릭의 죽음, 끝나지 않은 질문들
매캐릭의 사망은 가톨릭 교회 내 구조적 책임과 지도자들의 도덕적 해이, 그리고 오랜 침묵의 공범 구조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남긴 채 마무리되었다.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은 "정의는 실현되지 않았다"며 깊은 좌절감을 드러내고 있으며, 전 세계 교회개혁운동은 다시금 교회 권력구조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요구하고 있다.
바티칸은 매캐릭 사망에 대해 "언급할 사항이 없다"고만 밝혔으며, 미국 가톨릭 주교회의(USCCB)도 별도의 추모 메시지는 발표하지 않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고위 성직자의 몰락과 함께, 가톨릭 교회는 다시금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할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